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 [[중국 인민지원군]]은 [[인천 상륙작전]] 및 이어진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의 [[38선]] 돌파 이후 패주를 거듭한 [[조선인민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조직, 투입된 원정군이다. 이미 [[6.25 전쟁]] 초기부터 중국 수뇌부는 [[김일성]]이 [[서울]]을 함락하고 승승장구하는데 도취되어가는 점을 우려해왔다. 특히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이 결성되며 극동의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당장은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조선인민군]]이 붕괴되고 이로 인해 둥베이([[만주]]) 지역에 커다란 안보공백이 생길 가능성을 예견했다. 이에 7월 7~10일 〈둥베이 변방 보위에 관한 결정(关于保卫东北边防的决定)〉을 수립하고, 7월 13일에 제13병단(제38·39·40군)과 제42군, 포병 제1, 2, 8사단, 1개 고사포 연대, 1개 공병연대 등 25만 5천 병력으로 둥베이 변방군(东北边防军)을 편성한다. 둥베이 변방군 사령원[* 당시 [[인민해방군]]은 사회주의적 평등 이념에 따라 권위적인 사령관(官) 대신, 근본적으로는 일반 병사와 동등한 일원이라는 의미로 사령원(員)으로 불렀다.]에는 쑤위(粟裕)가 임명되었다. 쑤위는 1920년대 [[난창 폭동]] 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한 역전의 용사였고, [[국공내전]]에서도 화둥야전군 사령관, 제3야전군 부사령관 등 여러 중책을 역임했다. 1950년 1월부터는 [[장제스]]가 쫓겨간 [[대만]]에 최후에 일격을 가하기 위한 공격 준비의 총책임을 맡는 등 [[마오쩌둥]]의 신임이 각별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완전한 통일보다 시급한 문제가 된 둥베이 방위의 임무도 그에게 맡길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랜 세월 격무에 시달린 쑤위는 곧이어 [[고혈압]]으로 쓰러졌으며, [[메니에르병]]까지 얻어 치료와 요양을 위해 [[소련]]으로 보내져 상당 기간 복귀가 어렵게 되었다. 쑤위의 대안으로 고려된 지휘관은 [[린뱌오]](林彪)였다. [[린뱌오]]도 쑤위처럼 오랜 참전경험을 갖고 있었고, [[국공내전]] 후기에는 둥베이 전역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특히 [[북중국경]]에 배치된 제13병단은 그가 이끌던 제4야전군 예하 병력으로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제4야전군 예하였던 제13병단이 1진으로 한반도에 출동하자, 유엔군 측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린뱌오]]일 것이라고 오인했다.] 그러나 [[린뱌오]]도 과거 부상 후유증 등의 여파로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아, [[국공내전]] 종식 후에는 공식 활동을 자제하고 칩거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쓰러진 쑤위를 대신해 [[린뱌오]]를 임명하고자 1950년 9월에 그를 불러들여 의견을 구했으나, 이 자리에서 [[린뱌오]]는 “미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침공한다면 내가 직접 나서겠지만, 당장은 압도적인 미군에 맞서 승산이 없는 한반도 출병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그 사이 둥베이를 책임진 [[가오강]]의 지원 하에 제13병단은 한반도 출병 준비를 계속 진행했다. 아울러 본토에 주둔한 제9병단과 제19병단도 유사시 증원부대로 간선철도 부근에 대기하도록 조치한다. 9월 들어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예상대로 [[조선인민군]]이 급속도로 붕괴되자, 10월 초에 중국 수뇌부는 조선출병을 결정하고, 10월 8일 부대 명칭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개칭한다. 또한 사령원으로는 시베이(西北)군구 사령관이던 [[펑더화이]]를 임명한다. [[펑더화이]]는 지적인 면에서는 쑤위와 린뱌오보다 한 수 아래였으나, 보다 낙관적이고 우직하게 난국을 타개하는 뚝심이 있었다. [[린뱌오]]와 달리 한반도 출병에도 찬성했다. 압도적인 미군을 상대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매복과 은폐에 능한 중공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미군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래도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북진을 거듭했기에, [[중국 인민지원군]]도 출병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10월 19일 밤부터 제38·39·40·42군 등 4개 군 병력은 안둥(단둥), 지안 등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입했다. [[펑더화이]]도 초기에는 따로 지원군 총사령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그냥 제13병단 사령부를 지원군 사령부로 활용하였다. 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에 펑더화이,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에 덩화, 부사령관에 홍쉐즈와 한셴추, 참모장에 셰팡, 정치부주임에 두핑이 임명되었다.[* 여기에 공산권 특유의 조직인 당위원회도 있었다. 지원군 당위원회 서기에 펑더화이, 부서기에 덩화, 상임위원에 홍쉐즈, 한셴추, 셰팡, 두핑이었다.] 형식상 이는 연합사령부였기에 [[조선인민군]]에서는 중국측 인사들과 친분도 깊고 중국어에 능통한 [[박일우]]를 파견하여 지원군 부사령관 겸 부정치원 겸 지원군 당위원회 부서기를 맡게 했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화력이 막강한 [[미군]]은 되도록 피하고 약한 고리인 [[한국군]]을 통타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제38·39·40군은 한국군 제6·7·9사단 공격을 위해 야음을 틈타 전선으로 이동했고, 제42군은 서부전선의 [[원산]]-[[평양]]간 철도를 차단하고 산하의 제124사단을 차출하여 동부전선에서 방어만 담당하게 했다. 이 제124사단이 미군 제1 해병사단과 맞붙은 전투가 아래에서 설명할 '수동전투'이다. 이어 추가로 제50·66군이 증원되어 반격에 돌입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도 미군 제10군단이 북진의 고삐를 바짝 죄자 제42군 병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에 중국 수뇌부는 급히 둥베이 지역으로 이동 중에 있던 제9병단에게 곧장 한반도 동부로 출병하도록 명령하며, 이 제9병단이 장진호 전투의 주역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